올해는 단풍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인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건가.. 하고도 반문해 보았지만.. 반드시 그런것 같지는 않다.
나의 시골집은 강가에 있어 기온의 일교차 및 년교차가 아주 심하다. 기온의 일교차가 심한 가을에 단풍 색깔이 아름답다고 일컬어지지만 이 곳은 잎의 색깔이 변하기 전에 된서리가 내리는 적이 많았다.
어릴적 책갈피에 고히 모셔두었던 바알갛게 물든 감나무 잎새를 떠올리며.. 올핸 그와 똑같이 아름답게 물든 이파리를 볼 수 있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을라치면, 갑자기 서리가 내려.. 미처 잎들이 물들기전에 마치 삶은 시금치 처럼 폭삭 힘이 빠져 초록빛을 많이 띈 채로 요절하기 일쑤였다.
허나 그 곳의 단풍마저 올해에는 너무 아름답다. 이는 지구 온난화의 덕일까 ? 좀처럼 추워지지않으며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있는 요즈음의 늦가을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바알갛게 물들다 노오란 기운도 띄며 초록빛 본래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듯한, 복합적인 색조로 은은한 느낌을 주는 감나무 잎새.. 찬란하나 극히 짧았던 개화기를 보상받으려는듯 발그스름하게 아주 깨끗이 물들어가는 벚나무 잎새.. 노오란 색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강렬한 성깔의 은행잎.. 갈색으로 점잖게 변해가는 참나무류.. 단풍이라는 말이 자기 이름임을 자랑하며 새빨갛게 도발적인 단풍잎.. 치열했던 젊은 날의 영화를 뒤로 하며 아쉬운듯 연노랑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카시 잎새.. 그윽하다 못해 고상하게 느껴지는 낙우송류의 연한 고동색은 본래의 초록빛 침엽과 대비되어 멋진 보색관계를 연출한다.
양재천 뚝방길로 걸어간다. 매일 출퇴근 하는 길이지만 나날이 변해가는 잎사귀들이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끼게 한다. 지구는 정말 아름답다. 사계절을 가진 우리가 행복하다. 벌써 낙옆이 지어 홀가분한 몸매로 다음 來世(봄)를 기약하는 놈들.. 한참 멋드러진 색깔로 한 해의 황혼을 구가하는 놈들..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받아 악착같이 몸을 더 불리겠다고 파란 이파리들을 독려하며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부류들.. 나는 어떤 모습일까 ?
올가을엔 타의로 시작하여 자의로 여러번 산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특히 계룡산 동학사의 은행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샛노란 은행나무잎이 나무아래 겹겹이 쌓인 위로 젊은이들이 그 위에 모여앉아 환호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허긴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자연의 상대로서 간주하는 이러한 시각도 어설프긴 하지만..
나뭇잎은 떨어져 자신의 뿌리쪽으로 모이고.. 인간은 죽을 때 고향을 그린다던가 ?
같은 동네에 사는 한 분이 자기 부인에게 설악산 단풍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모양이었다. 이 부인과 나의 집사람은 동년배로 서로 친하게 지내는 관계로, 두 부부가 즉 넷이서 설악산으로 향하였다. 장수대로 올라 십이선녀탕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단풍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천불동계곡은 인산인해로 입장을 제한하던 시기였으므로 등산객이 적은 곳을 택한 차선책이었다. 나름대로 어여쁜 아기단풍과도 만나고.. 햇살이 투과하는 정도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온갖 색깔 이파리들의 패션쇼를 즐기고 남교리 선술집에 앉았다. 그 분은 자기 부인과 동갑으로 나보다는 네살이 적었다. 장유유서의 사회인 터라 나를 선배님으로 부르며 조금 어려워하는 듯 보였다. 막걸리가 두 순배 쯤 돈 후에.. 그 분을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인생을 팔십이라고 하면..
쉽게, 스무살까지는 봄.. 마흔살까지는 여름.. 예순살까지는 가을.. 그 이후는 겨울이라고 봅시다.
봄엔 부모슬하에서 공부하며 여름에 자신의 뜻을 펼칠 것을 준비하고..
여름엔 치열하게 햇빛을 받아 광합성하여 가을에 맺을 열매를 꿈꿉니다.
가을엔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수확하며 겨울에 대비합니다.
겨울엔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내세를 믿는다면 내세(또 다른 봄)를 기약합니다.
봄, 여름엔 태어난 순서대로 선배라 칭하며.. 때론 나이를 한 두살 뻥튀기하며 건방 떤 적도 있지만..
우린 이미 가을의 한 복판에 서 있는데.. 이제부턴 먼저 떠나는 사람이 선배이지요. 나이를 줄여 말하고 싶은 때도 있는걸요... 누가 선배가 될지 모르니 서로 편하게 부르고 지내지요 ? ㅎㅎㅎ
한가을에서 늦가을로 들어간다. 서서히 단풍이 들어갈 무렵. 나는 과연 어떤 색깔일까 ?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 마흔의 얼굴이 자신의 인생이라 하였는데.. 썩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하게 단풍들 수 있을까 ? 갑자기 그렇게 마음 먹는다고 바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날의 모습을 반성해 본다. 겨울을 준비하며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한 잎새의 깨끗한 단풍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