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理學 의 五行(木 火 土 金 水) 중의 하나인 물(水) 은 지구의 구성요소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생각된다. 바다가 지구 표면적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는 사람 몸무게의 2/3 이상을 차지하고있는 혈액을 비롯한 각종 체수분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몸은 적정량의 수분을 유지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육체적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은 주지의 사실이나 또한 정서적으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랑과 이별의 멋진 장면의 배경으로는 흔히 강이나 바다 호숫가가 등장하고, 슬픔과 방황 또는 공포나 긴장의 느낌을 극대화 하기위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동원하기 일쑤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이를 어머니의 양수속에 잉태되는 인간의, 물에 대한 본능적인 향수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두물머리란 강의 두 지류가 합쳐지는 곳을 말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두물머리는 그말 그대로 兩水里이다.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모아지는 곳인데 남한강은 정선에서 발원하여 영월, 단양을 지나 충주호로 흘러들어 여주, 이천의 공업단지를 지나 다소 오염되었으나,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춘천 소양호에서, 설악산에서 구비구비 내려온 내린천과 만나 가평, 청평, 대성리로 내려오는 동안 그대로 청정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 1, 2 학년(1972,3년) 시절 자주 찾은 곳이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춘선 완행열차였다. 그 시절 딱히 놀러갈만한 곳이 많지도 않았지만, 청량리역에서 종착역인 남춘천역 까지 2시간 40분간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주말 하루를 보내기가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는 주로 강촌역에서 내려 구곡폭포 밑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였으며 삼악산의 등선폭포 쪽을 오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구곡폭포위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길도 없는 미끄러운 폭포 옆을 치고 올라가 보니 상당히 넓은 평야가 있었고 우리가 끓이지도 않고 마셨던 폭포 물이 바로 논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란 사실을 알고나서의 그 황당함이란...
데이트 상대를 만나면 어김없이 경춘선을 타곤 했는데 주로 대성리나 청평에서 손수 노를 젓는 보트도 타고 춘천 공지천가의 '에티오피아의 집'이나 '에메랄드하우스' 에서 맛모르는 커피를 남들따라 마셔본 기억도 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의 모든 역이름을 줄줄 외기도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대충 기억나는 역들은 청량리-성북-화랑대-퇴계원-금곡-사릉-평내-마석-대성리-청평--가평--백양리-강촌--의암-남춘천 등이다. 보트를 저어 강 중간 쯤으로 나아가 호젓한 강위에서, 마주 앉아 있는 상대에게 어줍지않은 인생론으로 분위기를 잡아보려한 기억도 새롭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너하고 나하고 서로 다른 강가에서 태어나 우연히 만나 같이 이 배를 타고 있는데.. 저쪽 반대편 강가가 인생의 끝(죽음)이라 하고 인생을 팔십이라 한다면 우린 스므살 정도니까 강 중간 약 1/4 지점에 와 있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편 강가에로의 인생항로에서 수많은 풍파를 만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교적 순조롭게 삶을 영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매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불가의 이야기를 떠올리자면, 너와 내가 이렇게 이 곳 조그만 보트 위에 같이 앉아 있다는 것은 전생에서 비롯된 아주 크나큰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너와 내가 앞으로 얼마동안 만나 저 쪽 강가로 같이 노저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만나는 동안 잘 지내보자.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린 나이였었는데, 언젠가는 꼭 저 푸근하고 아름다운 강가에 자그마한 오두막 한 채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강촌 쯤 지날 때에는(삼십여년 전을 상상해 보라. 그 당시는 음식점이나 까페나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오지의 깨끗한 강 그 자체 만이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라는 노래가 자연스럽게 읇조려지는, 반짝이는 금모래가 창밖에 바로 보이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 후 70년대 후반에는 작은 배낭을 둘러메고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북한강가의 적당한 곳에 내려 사람이 주로 찾지 않는 오지를 홀로 서너시간 동안 걷다가 당일에 돌아오는 도보여행을 즐긴적이 있었다. 한 번은 춘천 남면의 어느 산길에서 이름도 모르는 같은 종류의 나비떼 수백 수천마리가 흙길위에 앉아 있다가 내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끼고 일시에 날아오르는 장관을 연출한 적도 있었다. 저녁 노을이 질 때 쯤 호젓한 오솔길에서 나만을 위한 나비떼들의 쇼 쇼 쇼.. 그때의 찬란한 광경이란 ! 참으로 경이로운 느낌으로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또 한 번은 샛터(대성리 근처)에서 양수리 쪽으로 비포장도로를 무작정 걸을 때였다. 지금은 2차선 이스팔트 도로로 잘 포장되어 있고 이제 교통량이 많아져 4차선으로 확장한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그 당시는 군사용 도로로 막 공사중 일 때였다. 왼편으로 북한강을 끼고 내려가다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어 강가 쪽으로 내려 갔다. 그 곳이 바로 이름도 예쁜 白月里 였는데 강 바로 옆에 마을이 있는게 이채로왔다. 집 마당 정자에서 서너발짝만 나가면 바로 강물이 출렁거리는.. 보통 강마을이란 하천의 범람 때문에도 강가에서 수십 혹은 수백미터 밖에 형성되는게 보통인데 그 곳은 다소 지대가 높아 강뚝에서 강이 꽤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마을 이름 그대로 하얀 달이 강위에 둥둥 떠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니..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운길산 수종사이다. 지금은 많이 개발되어 절 바로 밑에까지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주말에는 많은 차량으로 붐비는 곳인데, 일반적인 山行으로 따지면 별로 재미있는 곳은 아니다. 산행로에 수목이 없어 그대로 뙤약볕을 받아야 하는데, 가파른 진흙 비탈길을 뒤로 걸어 보았다. 한걸음 한걸음 뒤로 오를 때마다 달라보이는 두물머리의 장관이란.. 북한강이 바로 코앞이고 그 뒤로 남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1988 년에 기회가 되어 주말마다 강변의 땅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이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울 근교에서 강변의 땅이 매물로 나온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소위 전원주택이라는게 그렇게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값의 고하간에 강에 붙은 땅을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수개월 알아보다가 이제 강가의 땅은 포기해야하나 하고 생각할 때 쯤 주위의 아는 분으로 부터 연락이 있었다. 자신의 친구가 대성리 강변에 사과농장을 가지고 있는데 집안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긴급히 처분해야 할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청평 댐 위를 지나 비포장도로로 진입하여 보니 바로 대성리역 강 건너편이었다. 강가는 강가였으나 기대한 바와는 달리 경사가 너무 가파랐으며 북향인 점이 거슬렸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강 건너편에 바로 보이는 흉칙한 시멘트 골조의 건물이었다. 자연환경에 걸맞는 아름다운 인공구조물은 그 자연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우린 어느나라 못지 않는 아름다운 산천을 가지고도 수준낮은 색감의 싸구려 건축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양수리의 복덕방에서 전갈이 왔는데 강가 매물이 하나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직자 재산 신고가 시행되기 직전으로 소유자가 긴급히 다른 사람에게 명의이전을 하여 자신의 신고 재산에서 빼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 정보과 고참형사였는데 경매로 나온 물건을 자신이 낙찰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거에 매운탕 집을 했었다는 허름한 단층 적기와 건물이 있었고 현관 앞 양 쪽에는 재래종 감나무 두 그루, 그 앞마당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배수가 안되는 고추밭이 있었고 백여미터 쯤 떨어진 강가에는 수십미터 되는 미류나무가 대여섯그루.. 그외에는 여러해동안 관리가 안된 듯 동네에서 갖다버린 각종 농사용 폐비닐들이 군데군데 무덤처럼 쌓여져 있었다. 다소 황량한 느낌은 들었으나 눈 앞에 펼쳐지는 북한강의 고요한 자태는 다른 모든 부정적인 상념들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의 일은 모두 일사천리. 그 당시도 개발제한구역의 농지를 구입하는데는 여러가지 제한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든 것이 순조로왔고 나는 그런 것을 신경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 형사가 워낙 마음이 급했던 것이었다. 필요한 서류만 띄어다주면 그가 모든 등기이전 절차를 대행해 주었다. 불과 며칠 만에 상황종료. 원하는 땅과는 인연이 있어야 하고 인생사에는 '보이지않는손' (Invisible Hands)이 작용한다는 자그마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두물머리에서 샛터 방향으로 약 5킬로미터. 남양주시 鳥安面 三峰里.. 새가 쉬어가는.. 눈앞에는 北漢江.. 남향집 뒤로는 세개의 작은 봉우리.. 실로 십오년 만에 경춘선 완행열차에서 빚은 작은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승용
원장님 전원주택에 대한 behind story...^^; 그곳 경치 정말 아름답고, 정원도 너무 예쁘게 꾸며놓으셨어요. 얼마전 춘천 갈 때 그리 지나갔었는데...
08/23